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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감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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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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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감정의 흐름 살펴 보기 아이가 감정의 수챗구멍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도 힘든 하루였다. 영미씨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해야 할 일이 남아있지만 아이의 중간고사가 몇 일 남지 않은 시기라 일할 거리를 싸 들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마트에 들려 아이가 좋아하는 반찬거리와 간식을 한 손에, 일할 서류가 들어있는 가방을 다른 한 손에 들고 문 앞에 섰다. 비닐 봉지를 내려놓고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는데, 집안에서 후다닥 소리가 나는 것이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급히 방문을 닫는 것이 보였다. 부엌에 짐을 놓고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험 공부한다고 이번 주는 다니던 학원들도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대견한 얘기를 한 아이였다. 아이는 긴장한 얼굴로 “엄마 왔어요?” 인사를 하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많은 부모들이 시간이 지나서 생각하면 별 것이 아닐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아이를 크게 혼냈다는 사실에 아이에게 미안해하고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곤 한다. <출처: gettyimages>

번뜩 영미씨는 마루로 가서 TV로 갔다. LCD모니터에 손을 대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너 일루 나와!” 아이는 쭈뼛쭈뼛 걸어 나왔다. “그게 아니라, 공부하다가 잠깐 쉬느라고 야구가 궁금해서. 잠깐만 보려고 그런 건데..” 영미씨는 아이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리모콘을 들어 TV를 켰다.채널은 스포츠 중계가 아니라 영화채널이었고, 한참 신나는 액션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영화삼매경에 빠져있었던 것이었다. “너, 엄마가 죽으면 속이 시원하겠니? 속상해서 죽으면 그때 정신차릴래?” 영미 씨는 아이의 등짝을 때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 거니? 지금 시험이 코앞인데 영화가 머리에 들어가니?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뭐가 되려고 그러는 거야?”

한참을 혼을 내고 나니 진이 빠졌다. 아이도 눈물콧물 흘리면서 울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미안해하면서 마무리를 지었다. 아이는 방안에 들어가 책상에 앉아있지만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것이 공부 할 기분은 영 아닌 게 분명했다. 부엌에 서서 음식을 준비하면서 영미씨는 잠시 정신이 나간 게 아니었나 싶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험 공부하는 중에 TV를 보는 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아이를 잡았나 후회가 돼 더 미안해지고 자신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문제는 이런 일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꼭 영미 씨와 아이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많은 집에서 오늘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감정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아이가 감정의 수챗구멍이 되었기 때문이다.

감정의 흐름을 이해하기

여러 군데에서 흘러 들어오는 부정적 감정들이 쌓여 차 오르면 자동적으로 낮은 곳을 찾아내 흘러내리게 된다. <출처: gettyimages>

감정은 이성으로 판단해서 합리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 감정은 물과 같다. 고여서 넘칠 것 같으면 어딘가로 흘러 간다. 부정적 감정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는 여러 군데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 친구들과 갈등이 있는 것, 배우자와 요새 냉각기간인 것, 경제적 압박감으로 힘든 일이 있는 것, 혹은 몸이 아파서 병원을 다닐 정도라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것도 부정적 감정이 쌓여나갈 원인들이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차 올라오면 넘치기 직전이 된다. 넘치면 안되니까 어딘가로 흘러 보내야만 한다. 넘쳤다가는 대형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들어오는 양만큼 잘 흘러내려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지 못했거나, 자기가 확보해놓은 통로보다 더 많은 양이 흘러 들어올 때 문제가 생긴다. 이때 쌓여있던 감정은 자동적으로 가장 낮은 곳을 찾아낸다. 타일을 붙이는 미장기술자들이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공사로 치는 것이 화장실이나 다용도실의 바닥공사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평평하지만, 물이 어느 한곳에 고이지 않고 모두 한쪽 구석의 수챗구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가게 세심하게 공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도 그렇게 0.5도의 경사도가 내려간 곳만 있어도 바로 그 방향으로 흘러 내려간다. 낮은 곳은 바로 내가 상대할 때 약한 곳, 합리적으로 화를 내도 되는 곳이고 집에서는 대부분 아이가 되기 쉽다. 위의 사례에서 보면 사실 아이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엄마가 직장에서 힘들었던 일들이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마음 안에 안고 들어온 것, 몸이 피곤하고 지친 것들이 한데 모여있다가 아이에게 흘러내려간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메커니즘은 부모가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고통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한다. 이를 화풀이의 관점에서 이해해보자.

부모의가 감정흐름을 아이의 잘못으로 스며들다

 

데이비드 바래시와 주디스 이브 립턴은 부부로 한쪽은 진화생물학자이고 한쪽은 정신과 의사다. 두 사람은 [화풀이 본능]이라는 책에서 고통의 전달방식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하며 3R로 풀었다. 첫 번째가 보복(retaliation)이다. 보복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즉시 가해자에게 반사하는 반응이다. 이 반응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다. 복잡한 신경체계가 필요치 않으며 사실 뇌가 없어도 된다. 해파리를 건드리면 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톰이 딕을 공격하고 바로 딕이 맞받아친다. 대개 그 반응은 순식간에 벌어지며, 비례적이고, 무의식적이다. 두 번째는 복수(revenge)다. 톰이 딕을 공격하고 딕도 톰을 때린다. 하지만 딕이 공격받은 즉시 바로 대응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공격의 강도도 동일하지 않다. 지연된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시칠리아 속담 중에는 “복수는 식혀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 같다”는 말도 있다.복수의 강도는 비례적이지 않다. 눈을 이로 갚기도 하고, 때로는 눈을 생명으로 갚는 일도 있다.

여기까지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 대일의 관계를 갖는다. 어찌 보면 정정당당한 면이 있다. 그런데 세 번째가 문제다. 바로 화풀이(redirected aggression)다. 톰이 딕의 꽁무니를 쫓고, 딕은 처음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는 해리의 뒤를 쫓는다. 불합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일은 항상 벌어진다. 특히 해리는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런 일을 겪는다. 엄밀히 말해 화풀이는 고통을 상대에게 되갚아주는 앙갚음이라기보다 상관없는 옆의 누군가에게 갚아주는 행위다. 그런데, 이는 꼭 상관없는 이에게만 가는 게 아니라, 빌미를 제공한 사람에게 가게 되어있다. 심리학자들은 일종의 희생양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이를 지정된 죄인 (designated transgressor)이라 하고, 가정 내에 이미 존재하던 역기능에 대해 탓을 할 대상을 만들어 고통을 전가한다는 것이다.

1) 보복 : 1:1, 실시간

보복  : 1:1, 실시간

 

2) 복수 : 1:1 비대칭, 시간차, 양적 불균등 가능

복수 : 1:1  비대칭, 시간차, 양적 불균등 가능

 

3) 화풀이:

화풀이

 

이때, 피해자2는 가장 약한자다. 나보다 약한자를 향해 폭탄 돌리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화풀이의 흐름으로 가는 일반적 방향은 세 가지다. 하나는 자기 주변의 약자다. 가정이나 일을 하는 곳에서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고통을 전가한다. 두 번째는 감정노동자다. 백화점이나 식당과 같은 곳에서 불편이 발생할 때 전에 없는 분노감정과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세 번째는 유명인이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인터넷과 여론이 들끓는다. 이 역시 자신과 이해관계가 없지만 화를 다같이 내도 되고, 비난을 해도 되는 대상이 등장하면 그동안 쌓여온 감정을 일거에 털기 위해 그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게 된다. 마치 동네에 잠시 쓰레기 하치장이 생기면 그동안 집에 있던 버릴 물건들을 주섬주섬 들고 나가 버리는 것과 같다.

이 모두가 우리 사회의 건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는 올바른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어딘가로 털어내야만 하는 절박감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아이가 잘못을 한 것은 있다. 하지만 그것을 그 잘못만큼 혼을 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혼을 내고, 감정을 폭발하는 일이 벌어진 것은 다른 곳에서 받아온 고통과 감정적 스트레스들이 차 올라온 것이 그곳으로 한 번에 흘러 들어가서 벌어진 것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누운 것’이다. 어른인 부모입장에서는 잘못한 일에 대해 혼을 내는 것은 부모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화풀이적 감정의 흐름이 개입되어있다면 그것은 훈육을 한다는 이유로 합리화된 고통스러운 감정의 전가에 지나지 않기 쉽다. 비겁한 행동이다.

아이를 혼낼 때 자신의 화풀이적 감정의 흐름이 개입되면 그것은 훈육을 한다는 이유로 합리화된 고통스러운 감정의 전가로 나타날 수 있다. <출처: gettyimages>

그러다 보니 당하는 아이는 황당하다. 물론 잘못한 일이기는 하지만 혼난 규모로 보면 가출을 했다가 돌아왔거나, 학교 폭력의 가해자가 되었거나, 집안의 물건에 손을 대다가 걸린 정도 수준이었을 뿐 아니라, 엄마의 감정의 끝을 보면서 아이는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원초적 불안까지도 경험할 정도로 극심한 공포감에 벼랑근처까지 가버리는 일이 생긴 것이다. 엄마도 후회하고, 아이도 당황하게 되는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은 이런 화풀이의 메커니즘 속에 발생하는 감정의 흐름을 부모가 인식하지 못한 채 자기 고통을 그대로 아이의 잘못을 혼낸다는 합리적 이유에 얹어 전가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특히 아이에게 이런 감정적 폭발을 하게 되는 방아쇠가 되는 이유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아이에 대한 실망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갖고 있는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할 것이라 여기는 수준에 기대, 자율성을 인정하고 혼자 잘 하리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면서 아이에 대해 큰 실망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실망은 허상이기 쉽다. 혼자서 규정해놓은, 아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자율적인 자기관리의 수준을 만들어놓고 그걸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아이를 탓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끊임없이 아이에 대해 실망하고, 수준도달에 실패한 것에 대해 실망하고, 아이는 나의 자아의 확장이기에 아이의 실패가 자신의 자존감에 낸 상처를 받아들이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의 굳은살이 배기고 맷집이 강해진다. 그렇지만 많은 부모가 그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망이 큰 아픔이 되면서 방아쇠가 당겨지고, 그동안 다른 곳에서 쌓여온, 혹은 아이와의 관계에서 차곡차곡 다져진 감정들이 단번에 발사되어버린다.

두 번째는 아이에게 무시당했다는 감정이다. 아이가 내 말을 무시했다, 아이마저도 내가 시킨 것, 내가 하라는 것을 무시하고 듣지 않았다는 것은 큰 감정의 상처로 남고 이에 대한 격한 반응이 화풀이의 방아쇠에 얹어놓은 손가락을 확 당기는 힘으로 작용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아이는 부모를 무시한 적이 없다. 부모가 무시당했다고 느낄 뿐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일방적이라 할 정도로 부모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유하고 있다.

아이에게 발생하는 일

폭탄 돌리기로 받아 든 이 불쾌한 고통의 폭탄은 어디든 풀 곳이 없는 약한 아이에게 우울증을 안겨줄 수 있다. <출처: gettyimages>

문제는 이런 감정의 수챗구멍이 되어버린 아이는 별 일이 없는가다. 부모에게 혼이 난 아이는 폭탄 돌리기로 받아 든 이 불쾌한 고통의 폭탄을 역시 어딘가로 흘려 보내야만 한다. 이때 당장 가장 만만한 것은 집에서 자기 동생에게 못되게 구는 것이다. 동생이 자기에게 잘못을 하면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일은 사실 이런 메커니즘의 일부인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학교에서 공격적인 아이가 된다. 의외로 집에서는 차분하고 그리 혼이 날 일이 없는 아이가 학교에서는 짜증을 쉽게 내고, 선생님에게 대들고, 친구들과 자주 다투는 경우를 많이 관찰하게 된다. 이 경우 집에서 순하고 차분하다는 것은 집안 교육이 잘된 경우도 있지만 알고 보면 부모의 감정의 흐름의 수용자가 되기 때문에 알아서 잘 처신을 하면서 그 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또 집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부모를 상대로 풀지 못하면서 지내다 보니 부모가 볼 때에는 말 잘 듣고, 별 문제가 없는 아이로 보이기 쉽다. 그렇지만 사실 아이는 그 고통을 자기 안에 안고 있다가 학교로 가서 만만한 상대를 대상으로 풀어내는 일이 벌어진다. 세 번째는 어디든 풀 곳이 없는 약한 아이에게 생기는 우울증이다. 공격성이 외현화되면 공격적이 되고 짜증을 내지만, 그럴만한 상대도, 용기도, 배짱도, 힘도 없다면 그 고통의 폭탄은 자기 안에 남아있다가 그대로 총구를 자신에게 향한다. 우울하고 쳐지고, 학교를 거부하고,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고, 집중을 못하는 증상이 생길 수 있다.

부모는 판사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무엇보다 먼저 이런 감정의 흐름이 있다는 것, 자칫 아이가 부모의 ‘감정의 수챗구멍’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 실제로 그런 경우가 그동안 많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부모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나름의 양형 기준을 가지고 그에 따라 일관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 <출처: gettyimages>

그리고 부모는 일종의 판사가 되어야 한다. 판사는 각각의 잘못에 대해서 양형 기준을 갖고 있다.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 벌금형을 내릴지, 집행유예를 할지, 구속을 한다면 몇 년을 할지에 대해서 각각의 세세한 규정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안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판사의 그날 감정에 따라서 무죄가 될 사람이 20년 징역형을 선고 받거나, 5년형을 살 사람이 벌금형으로 끝나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그렇듯이 부모도 아이와의 관계에서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 나름의 양형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자신의 감정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객관적 기준이어야 한다. 만일 엄마와 아빠가 서로 긴밀하게 소통을 하면서 아이의 같은 행동에 대해 최대한 비슷한 기준을 갖고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만일 이런 기준이 없이 엄마의 감정에 따라 아이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된다면 아이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고, 그 행동의 경중이 어떤지에 대해 판단을 하기보다 먼저 엄마의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우유를 마시다가 실수로 마루에 흘렸는데 엄마 기분이 나쁜 날에는 심하게 혼이 나고, 엄마에게 학원을 간다고 하고 친구들과 놀다가 왔는데 엄마가 그날은 기분이 아주 좋은 날이라 그냥 “다음에는 그러지 마라”라고만 말하고 그냥 넘어가버린다면 아이는 혼란에 빠지게 될 뿐이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실수했는지에 대해 돌이켜보고 반성하기보다, 엄마의 오늘 기분이 어떤지 눈치부터 보는 아이가 된다.

감정은 흐름을 갖고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아이에게 흘러내려간 감정도 또 어딘가로 흘러갈 것이다. 내가 무심코 흘려버린 감정이 자칫 아이의 대인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학교생활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또, 아이가 자라나서 어느 순간 둘 사이의 관계가 역전이 되는 날이 오면 아이는 자기가 배운 그대로 부모에게 되돌려준다. 감정적으로 반응을 하고, 화를 내고, 자기 감정대로만 반응을 하고, 객관적 기준이 없어서 도대체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할 지 모르겠는데, 아이가 너무 커져버려서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는다. 또 말로는 설득이나 타협이 되지 않는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공격자와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aggressor)’라고 한다. 괴물의 탄생이다. 하지만 그 괴물 탄생의 씨앗은 부모가 자기 감정의 고통을 처리하기 위해 버린 수챗구멍에서 자라난 것이었던 것이다. 지금, 오늘부터라도 그 악순환의 시작을 멈춰야 할 것이다.

하지현/건국대학교 병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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